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치슨 라인 (문단 편집) === 일각의 [[남침유도설]] 주장 ===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남침유도설|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1949년 6월 26일 철수했다. 미국 군부는 한반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빨리 철수하고 싶어했는데, 미국 국무부는 한반도에서의 조기 철수에 반대했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의 맥아더 파벌이 한반도의 수호를 주장했다. 참고로 남침유도설을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대개는 원망과 한탄조 내지는 미군도 못 믿는다 정도의 뉘앙스지만.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남침유도설 주장이 재야와 대학가에 퍼졌는데, 이건 강대국들의 외교 문서가 공개되지 않던 냉전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은 정작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전차같은 무기를 주면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봐 두려워 방어적인 용도로 사용할 무기만 지원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마셜 플랜|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삼팔선|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이 전차를 가졌으니 전차를 보급해달라는 등, 당시 중국과 소련을 통해 물자와 병력 보충을 받던 북한 사정을 근거로 한 이승만의 국군 전력 강화 요구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이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전에도 잦은 과장을 일삼았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억지 또는 착오로 여겼다는 것이다.[* 가령 이승만은 미국에게 북한이 해주에서 서울까지 포격이 가능한 대포 4문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거리는 70km가 넘는다. 미국 또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반응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1949년 6월 미군 철수가 흔히 ‘미국의 한국포기’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이는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다. 군부의 철군주장은 무조건적인 즉각적 철수였지만, 국무부와의 타협을 거치면서 실행된 철군은 여러 보완조치가 선행된 조치였다. 군부는 1945년 9월 진주시부터 가용병력의 부족과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의 저평가(低評價), 전쟁이 이미 끝났음을 들어 진주자체에 반대하였으며 이후로도 계속 철군을 주장했다. 하지(John R. Hodge)사령관의 경우 초기에는 계속 철군을 주장하였지만, 북으로부터의 위협을 현장에서 감지하고 나서는 철군이 막상 구체화되었을 시점부터 국무부의 입장에 동조했다. 즉 철수일정을 연기시키고 한국에서 내부적인 안정을 기하려는 계획을 지지하면서, 외부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남한의 국방력에 보다 적극적인 군사원조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1949년 중국이 넘어간 이후 미 국무부는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 인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 >2) 애치슨이 선을 그은 의도 >그런데 1950년 1월 애치슨라인 설정에 의한 한반도의 제외 결정이 ‘미국의 불개입’ 함정을 파놓았다는 가설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후일 애치슨은 한국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었을 뿐 한국을 포기한다는 공약을 한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애치슨의 연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극동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 일본 본토를 거쳐 류큐(오키나와 섬)로 이어진다. …… 방위선은 류큐(오키나와 섬)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된다. …… 이 방위선 밖에 위치한 나라의 안보에 대해서는 군사적 공격에 대하여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만약 공격이 있을 때에는 …… 제1차 조치는 공격을 받은 국민이 이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설은 바로 뒤에 만약 방위선 바깥의 지역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진다면 “우선은 공격받은 국민들이 그에 저항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유엔헌장 아래에서 전체 문명세계가 개입”할 것이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애치슨이 한국의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후 설명은 실제로는 남침을 유도했으면서도 ‘발뺌’하기 위해 거짓을 얘기했거나, 아니면 남침을 야기시킨 결과에 대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일 수 있다. >애치슨의 의도는 미국이 대륙에서의 군사충돌을 회피하고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으며 남한과 국민당이 유엔의 지원으로 자체 안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표현은 부주의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우회화법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 >'''그런데 실제로 5월 초 상원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Tom Connally)는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고” 애치슨라인 이외의 한반도에 관련된 라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명백히 말했다. 즉 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미국의 방위선에 한국은 제외되며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고 말했다. 또한 소련이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대만을 점거할 수 있듯이 쉽게 한국을 정복할 수 있다고 부기했다. 코널리는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이 이러 저러한 일이 일어나면서 우리를 전쟁에 나가게 만들 사건이 교묘히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They believe that events will transpire which will maneuver around and present an incident which will make us fight)는 유도설을 연상시키는 언어도 구사했다. 이에 대해 애치슨은 5월 3일 기자회견을 통해 코널리의 견해를 정정할 것을 공개적으로 거절했으므로 애치슨의 후일 주장은 발뺌일 가능성이 있다.''' 코널리의 회견이 전해지자 한국 언론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5월 9일 이승만은 코널리의 회견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남한으로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리라고 노골적으로 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an open invitation to the Communists to come down and take over South Korea)고 비난했다. > >따라서 애치슨라인이 북의 오판을 어느 정도 야기시켰을 가능성은 있다. 리차드 닉슨은 1980년에 발간된 책에서 “북한이 애치슨의 의도된 왜곡 발언에 오판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애치슨은 1951년 맥아더 청문회에서 버드(Byrd) 상원의원이 “미훈련이며 장비도 형편없는 군대를 그곳에 남겨 둔 것은 한마디로 공격에의 초대(an invitation for an attack)가 아니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 점은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다”(You may be right about that)고 대답했다. 물론 애치슨라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었고 철군이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었지만 이 발언이 남침야기에 대한 애치슨의 ‘최대한 인정’이었다. 애치슨은 1970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이것이 내가 1950년 1월에 던진 경고였고 침략자가 소홀히 한 경고였다” 고 말해 자신은 침략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뿐 침략을 유도한 것은 아니라고 회고했다. 그런데 위의 증언을 심층적으로 볼 때 애치슨라인은 커밍스의 주장처럼 대만 제외에 의한 대중(對中) 화해 제스처와 중·소 이간 의도에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분명 ‘북한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발표된 측면이 있었다. 그 메시지가 침략 말라는 경고이건 아니면 침략 유도이건 간에 말이다. 그런데 침략을 말라는 경고를 하면서 알류샨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등의 명시적 방위선에서는 빼고 태평양의 다른 지역(물론 한국을 이 지역으로 분류한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다)으로 분류한 것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이 지역의 군사적 공격에 대한 저항은 일차로 공격받는 주민들에 의존해야 하며 그런 연후에 상황이 재평가되어 유엔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언급되었다. 이것은 롤백 보다는 봉쇄를 선호한 애치슨이 봉쇄의 원칙을 언술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경고라고 하면 “한국을 방위할테니 침략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구절이 포함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애치슨은 경고의 특성에서 보여지는 ‘과장되고 높은 톤’의 목소리로 얘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한은 유엔이 방위할 수 있다’는 소극적인 언사를 구사했다. 이는 남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소극성의 발로라는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 ‘침략을 초대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후일 애치슨의 공화당 정적 들 특히 [[조지프 매카시|맥카시(Joseph McCarthy)]]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공격하라는 ‘파란 불’(a green light for aggression)을 보냈다고 비난했다. >... >그런데 매트레이는 북한이 미국의 불개입을 예상했기보다는 오히려 개입의 정도가 깊어질 것을 우려하여 더 깊어지기 전에 남침을 도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성공하여 남한이 확고하게 안정될 것(미의 개입 전술 성공)을 두려워하여 이것이 달성되기 전에 전쟁을 개시한 것이라는 추론이다. 즉 철군으로 조성된 힘의 공백이 장래의 더 큰 개입을 막기 위한 호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직접적 무력개입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군사비 지원 등의 간접개입은 예상했다고 매트레이는 해석했다. 한편 1950년 5월 중순 덜레스의 남한 국회에서의 연설과 이승만과의 회담, 38도선 시찰 등 일련의 행위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새롭게 개입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평가해 이를 막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 >5) 전쟁 직전 미국의 한국 방위 확인 >그런데 미국 국무부는 모든 위험상태를 계산에 놓고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당시 북한으로부터의 위험을 의식하여 남한을 안정시키려는 목표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간접개입을 확대해 나아갔다. 트루먼은 1949년 6월 19일 의회가 대한원조를 승인해 준다면 미국은 아시아 전역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실천할 주요 조치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는 공화국(한국)이 실천에 옮기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과 원칙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공산주의 통치와 서로 맞붙어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하나의 시험장이다. 공화국의 생존과 자립적이며 안정된 경제로의 발전은 전체 아시아인들에게 지대한 그리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천한 공화국의 이러한 발전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도서민들을 고무시켜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공산주의 선전에 대항하여 이를 물리칠 수 있게 할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성공과 또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저력도 아울러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을 유린한 공산세력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동아시아인들의 등대가 될 것이다. >즉 한반도는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봉쇄를 실행하는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시험 케이스(test case)였다. 실제로 1950년 선거가 민주적으로 치러져 정치적 안정이 달성될 수 있었고 재정위기도 호전되고 있었다. 또한 1950년 6월 1일 트루먼은 미 의회가 예정된 군사원조를 승인하기만 하면 “이승만 정부가 북에서 감히 침략할 엄두조차 못 낼만큼 강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6월 17일 38선을 시찰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개인 특사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6월 19일 한국 국회에서 “만일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은 한국을 방위할 것”이라고 다소 도전적인 어투로 공언했다. 이것이 오히려 ‘이승만과의 북침공모’나 즉각적 개입을 위한 시나리오, 북침 혹은 남침유도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예측, 공격할 자의 덮어씌우기 예언 등으로 해석되지만 증거가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방위공약은 단순한 허풍이거나 ‘예상하지 못한 적중’이 되어 버린 것이다. > >만약 김일성이 덜레스의 발언을 주목했다면 남침시 적극적 개입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주목했다는 증거는 없다. NSC 8(철군주장; 1948년 4월 2일)이 초래했던 공백이 NSC 68(방위비증가와 주변지역에서의 Rollback; 1950년 4월 14일)의 등장으로 메워지려 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덜레스공약과 NSC 68에 의거, 미국은 예견된 즉각 개입의 시나리오를 진행시켰다. 애치슨라인에 입각해 본다면 6월 19일의 덜레스공약과 즉각 개입이 정책의 역전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롤백을 주장하는 강경론자 덜레스와 봉쇄-국제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하면서 공화당의 차이나로비에 맞섰던 애치슨은 물론 대비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철수와 무력개입이라는 양극단적인 정책대안을 모두 고려하면서 어느 중간지점에서 정책을 수행하였으며 한번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방위선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유엔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보호’는 어느 정도 암시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공산화 이후 무력개입 쪽으로 접근되어 가고 있었으며, 6·19(덜레스공약)와 6·25에 의하여 무력개입전략으로 집약되었다. >----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내전설과 남침유도설에 대한 비판적 조망, 이완범,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2006, vol., no.62, pp. 377-397 (21 pages)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042105|#]] 즉 엄밀히 말해서 애치슨 선언에서는 한국을 '포기' 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유엔에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상원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는 진짜로 '포기한다' 라고 말했었고, 한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됨으로 인하여, 전쟁 발발시 유엔에서 비난성명이나 하면서, 미군의 개입은 없고, 군수물자나 간접지원할 것 같은 가능성을 내비추었고, 이는 김일성이 미군 개입 이전에 속전속결로 적화통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